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(문단 편집) === [[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]] === [[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]]의 발단이 된 [[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]]의 사후 처리에 대해 양 웬리와 동맹 정부의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면 제국 진영으로 끌어들일 기회이니, 일단 양 웬리에게 함부로 군사 행동에 나서지 말라고 요청하고 빨리 조사관을 보내서 해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. 그리고 자신이 그 임무를 맡아 [[하이네센]]에 가도 좋다고 덧붙였다. [[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]]에서는 후방총사령관으로써 [[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]], [[울리히 케슬러]]와 함께 제국 본토에 잔류했다. 덕분에 세 사람이 모처럼 담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라인하르트의 지시로 바렌이 최전선에 호출되고, 케슬러가 신 수도 [[페잔(은하영웅전설)|페잔]]으로 임지를 옮기면서 혼자 남게 된다. 그러다가 [[회랑 전투]] 직전, 라인하르트의 명을 받아 휘하 함대 15,900척을 이끌고 [[이제르론 회랑]]에 침입, [[엘 파실 독립정부]]의 배후로 접근했다. 그런데 [[양 웬리]]는 허장성세로 [[엘 파실 혁명군]] 총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고, 메크링거는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. 당시 제국군은 양 웬리의 은폐 때문에 혁명군에 합류한 구 동맹군 병력 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, 메크링거는 전방에 있는 병력이 혁명군 총전력이 아니라 [[예비대]]를 제한 병력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다. 혁명군 총병력이 5만 척이라고 오판한 메크링거는 즉시 후퇴하여 회랑을 빠져나갔다. 덕분에 회랑의 전초전에서 비텐펠트와 파렌하이트가 대패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,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비텐펠트는 그냥 맞붙었다면 양 함대도 피해가 극심하여 나중에 온 아군 대함대에게 더 유리했으리라고 메크링거를 비난했다.~~메크링거: 나보고 죽으라고?~~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메크링거도 할 말이 있다. 무엇보다도, 당시 은하제국 본토 내에 주둔한 유일한 전략적 기동병력을 지휘하던 메크링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병력이 괴멸될 경우 본토가 전략적 방어병력 없이 각 성계 단위의 수비 병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. 이는 후방(본토)의 방어를 사실상 총괄해야 하는 입장에서,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본토 상실의 위험성을 감수할 수는 없다는 상식적인 판단인 셈. 애초에 이 부분은, 이제르론 회랑에 대한 전략적 협공이 필요하다면 라인하르트 자신이 본토에 충분한 기동병력을 남겨두었어야 했던 부분이다. 게다가 제국군은 [[양 웬리 함대]]의 규모조차 몰랐다. 이걸 다 고려하고 과감한 작전을 편 양 웬리가 괴물인 거지, 당시의 메크링거로선 어쩔 수 없었다.[* 사실 이는 메크링거보다는 라인하르트에게 책임이 좀 더 있다. 라인하르트로서도 사실 양 웬리의 향방을 몰랐으니 그도 뭘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2차 라그나로크 작전 당시 무려 '''17만'''척을 동원했는데 문제는 사실 이 정도 규모할 거 없이 그 절만만 동원해도 동맹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지만 신중함 때문인지 아니면 과시 때문인지 17만척이나 동맹령 침공에 꼴아박았고 때문에 양 웬리가 이제르론을 먹어버리자 회랑 전투에서 동맹령 출구 방향에서는 17만척이나 꼴아박고 지고 제국령 출구 방향에서는 고작 1만 5천척의 메크링거 함대로선 뭘 어쩔 수 없어서 후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. 결국 라인하르트가 너무 많은 병력을 동맹령에 투입하는 바람에 [[제10차 이제르론 공방전|돌발상황]]에 대비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진거다.] 때문에 비난이 쏟아지긴 해도 그럴만한 게 인정되어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